
히즈쇼스토리
- 저는 어릴 적부터 장난감을 가지고 스토리를 만들며 놀았습니다. 제가 아끼는 로봇은 늘 정의
편이었고, 마땅한 악당이 없어 필통, 카세트 등이 악당역활을 대신했습니다. 지금에 비해
장난감의 수가 많지 않아, 악당대타 역활을 맡은 필통, 카세트를 위해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제가 아끼는 로봇은 늘 승리했습니다. 그래도 스토리는 늘 새로웠습니다. 단순히
어제의 스토리가 기억이 나지 않아서도 있지만, 그 날의 감정과 생각이 스토리에 반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저는 신문이나 뉴스를 보고, 한줄의 기사를 곧잘 스토리로 상상해내곤 했습니다.
한줄의 문장을 재료로 상상이라는 다양한 양념을 버무려 나만의 요리를 만들어 갔던 것이죠.
예를 들어 '아프리카에 에볼라바이러스로 미국인 기자가 사망했다'는 뉴스를 보고, 이
에볼라바이러스는 미국의 비밀첩보단체와 제약회사가 정치자금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만들어낸 전염병이고, 우연히 사실을 알게 된 미국인 기자가 그 것을 폭로하려고 하자 사고를
위장하여 죽인 것이지 않을까? 라는 식이었습니다. 이 때는 모든 사실 뒤에는 대중에게
감춰진 진짜 사실이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전형적인 음모론자가 된 것인데, 돌아보면 대부분
허무맹랑한 공상이었습니다.
그런 공상이 유치하게 느껴지면서, 세상과 나라는 아주 근본적인 물음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왜 존재할까? 나는 어떻게, 왜 존재하는 걸까? 인본주의적 관점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이 세상은 우연히 존재하게 되었고, 나 역시 우연히 존재하게 된 세상에 우연히 존재하게된
생명체로, 언젠가 생명이 다하게 되면 다시 우연이라는 거대한 암흑으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세상과 나의 관계가 정리되자, 생명이 존재하는 동안 최대한 쾌락을
느끼는 것이 우연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내가 인지할 수 있는 유일한 행복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낭만주의적 세계관에 부합하는 삶을 살았었습니다. 현재를 즐긴다.
그게 내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다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로 나의 삶에 하나님이 개입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저는 짧은
지식과 경험이라는 벽을 세워 방어했지만, 하나님이 저를 자녀삼기로 결정하자 그 벽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 동안 의지했던 인본주의적 세계관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뜻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세계관이 하나씩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완벽한
스토리였습니다. 처음과 끝이 완벽히 맞아 떨어지고, 어느하나 흠잡을 데가 없는
스토리였습니다. 하나의 작은 스토리는 그 스토리대로, 또 그 스토리들이 모인 거대한 스토리는
그대로 완벽했습니다. 첫단추가 제대로 뀌어지자, 그 뒤는 일사천리로 맞아떨어져 갔습니다.
이 세상이 어떻게, 왜 존재하는지, 그 안의 나는 어떻게 왜 존재하는지, 그렇다면 오늘의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하는지가 명료하게 정리되었습니다. 저는 나중에 그 것이 회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회심을 통해 세계와 나와 오늘이 하나로 정렬되게 되었습니다.
어릴적 교회에서 배웠던 성경이야기들은 신화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신화처럼 인간의
욕망과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 것을 믿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한 이야기들 말이죠. 제가
보기에 그 이야기들은 상호연관성이 없었고, 이야기적 재미도 부족했습니다. 이야기 사이에
연관성이 없다보니, 뉴스와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작가의 의도도 알수 없고, 감정적인 동요도,
공감도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성경은 지루한 단편소설들이 지멋대로 모인 전집이었습니다.
하지만 회심 이후 보는 성경은 놀라움과 재미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정확한 의도를
가지고 시공을 초월하여 이야기를 써내려가셨다고 생각하니, 연관성없어 보이던 이야기들에
작가의 의도가 명확히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의도를 알고 읽으니 성경이야기를 통해 그 의도가
더 분명히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애니메이션과 영화를 공부하면서 성경이야기를 통해 놀랐던
점은 이 이야기들이 세상 모든 이야기들의 원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야기의 원형이라는
것은 모든 이야기의 조상이라는 부분도 되지만, 완벽한 스토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돌아온 탕자이야기는 탕자의 관점에서도, 아버지의 관점에서도, 형의 관점에서도 완벽한 의도와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통해 무언가를 전달하고자 한다면 성경이야기보다 더
좋은 텍스트를 찾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회심 후 몇년간 꼬인 실타래를 풀듯이 회심 전 읽었던 성경이야기들을 다시 읽으며 그
이야기의 의미를 다시 확인했습니다. 모두 알고 있던 이야기들인데 그 이후 그 이야기들은 전혀
다른 의미로 내 삶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다른 시대의 다른 장소에서 일어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지금 이 곳에서 나에게 일어나는 이야기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이야기를 통해 나에게 이야기하고 계신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의문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감사하게도 성령님의 강력한 임재하심을 통해
성경이야기를 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는데, 과연 성령이 아니면 그 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일까? (물론 성경에 의하면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우린 성경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그냥 단편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듯 전달할 수
있다면, 성경이야기를 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나가서 아직
세계관이 형성되기 전의 아이들에게 성경이야기를 실감나게 전달할 수 있다면, 아이들이 제대로
된 세계관을 세우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으로 복음이라는 사실을 스토리로 만들게 되었고, 그것이 스토리박스 1편 : 예수님의
놀라운 초대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 작품을 통해 견고하고 거대한 세상문화에 한줄기 틈을
보았습니다. 이 작품을 본 몇몇 아이들은 십자가에 못박하신 예수님을 슬퍼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꿈에서 만났습니다. 그 것은 생각지 못한 변화였습니다. 아니 생각은 했지만 그보다
더 큰 변화였습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은 저예산의 보잘 것 없는 이 작품을 받아들여줬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공감했고, 자기의 이야기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이야기에는 복음이
담겨있었습니다.
이 때 만났던 이 아이들의 이야기가 어려운 환경에서 계속 이 일을 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 때 한줄기 틈을 통해 하나님이 저의 삶을 통해 이루실 비전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것은
이 세상의 목적과 나의 존재이유, 나에게 주신 은사와 오늘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지가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명료하고 완벽한 스토리였습니다.
히즈쇼는 2011년 6월
이런 생각을 가진 청년들이 모여 만들어졌습니다.
교회의 어른들이 모두 말리는 일이었고,
대형교회나 교단의 지원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히즈쇼는 믿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청년들이 모여 만들어졌습니다.
교회의 어른들이 모두 말리는 일이었고,
대형교회나 교단의 지원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히즈쇼는 믿습니다.
우리가 만드는
하나님의(His) 스토리(Show)가
우리의 아이들을 변화시키고,
변화된 우리 아이들이
이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하나님의(His) 스토리(Show)가
우리의 아이들을 변화시키고,
변화된 우리 아이들이
이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